[노아에밀] 인터미션

 

평화로운…… 문장.

혹은 그것을 모방하는.

에밀리 샤일록은 네모난 빛이 들어오는 주방에 서서 차려진 식사 옆에 놓인 쪽지를 읽고 있었다. 그녀를 깨우지 않고 상을 차리기 위해 무진 고생을 했을 소년의 선의는 이 공간에서 잠시 잊힌다. 분홍색 메모지를 손가락 끝으로 휙 떠서 손안에 얹고는 일렬로 쭉 늘어선 시간과 장소를 입 모양으로 한 번 읽었다. 가타부타 덧붙이는 말이 없는 것은 반드시 와줄 것이라는 어떤 믿음이라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보호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알린다-는 욕망을 담은 ‘부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지 않은가. 에밀리 샤일록은 머리가 없는 사람의 부탁을 이미 한 번 들어준 적이 있다. 앞으로 남의 부탁을 함부로 떠안지 말자. 승낙하지 말자. 이미 벌어진 일을 놓고 후회하는 대신 그녀는 발밑을 구르는 머리를 집어 들어 저울에 올려놓았다. 반대편에는.
결국 저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는 남자아이.
오늘은 그 아이의 졸업식.

 

 

인터미션

내장

 

길 건너의 빵집은 일곱 시부터 문을 열어서, 신호등 앞에 멈춰서 기다릴 적마다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문 안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빵 냄새 신선한 원두 냄새, 치대고 으깨고 뭉개어 빚어 놓은 반죽들이 차분하게 구워지는 아침나절의 향기를 맛볼 수가 있었다.

건물에 가려져 대각선으로 우툴두툴 찢어진 햇빛 아래 선 채 그것들을 맡고 있다 보면은 갓 나온 빵 한 조각에 따뜻한 커피가 간절할 법도 하건만 초록 불이 들어오면 노아 헤르난데스는 그 앞을 지나치는 찰나의 순간에서 더욱 기꺼움을 느끼는 남자아이였다.

집안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보호자 대신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를 마치고서 불현듯 쪽지를 남긴 것은 그러한 성격에서 비롯된 변덕으로, 언제나 같은 시간에 집에서 나와 매일 아침 빵 냄새를 맡고 등교해 수업 들을 준비를 하는 일상 루틴도 오늘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내일부터는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러니 평온한 하루에 고별식이라도 치를 겸…….
노아는 바른 자세로 걷다 말고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높은 빌딩 위로 번지는 주황색 햇빛을 본다. 하얗게 타오르는 눈동자 속에서 자글자글 끓는 검은 동공. 인력引力으로 세상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것처럼.

오늘은 내일과 다를 것이다. 절대 같을 수 없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지고 피는 이치와 같을 터. 어제는 멀쩡했던 아버지가 오늘은 목 없이 돌아온 것처럼. 그런 만큼 노아는 매일매일을 성실하게 보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어쩌면 오늘 졸업식은 몇 년 동안 쌓인 오늘을 보상받는 날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오늘이 올 수 있도록 애써준 보호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노아 헤르난데스는 이만큼의 오늘을 보냈습니다.
당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널 버리지 않겠다는 말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때때로 그 말에 기대어 살아왔어요. 물론 에밀리가 제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여 주고 공중전화 부스에 저를 세워놓은 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질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왜 나를 계속 책임졌을까? 하고.

물론 노아는 여기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아주 어리석고 에밀리에게 무례한 짓이고 또…… 열 살짜리 아이를 책임지기로 마음먹은 스물 몇부터의 그녀를 폄훼하는 말이었으므로.

노아는 처음 에밀리를 만났을 때부터 무언가를 예감해서, 사춘기 시절인 지금까지도 왜 나를 책임졌냐는 둥 아버지가 잘못 생각했다는 둥 허튼소리를 일절 하지 않았는데 그건 그의 인생관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뱉으면 돌이킬 수 없는 지금. 어제의 당신이 반드시 오늘의 당신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오늘의 당신에게 진심으로 대하자.
이제 자신이 성인이 되면 에밀리는 어떻게 할까. 이제 너를 돌봐줄 의무는 없어. 너는 다 자랐고 이제 스스로 앞가림 정도는 할 줄 아는 나이가 됐지. 그럼 잘 지내. 연락은 편하게 해도 좋아. 캐리어 하나에 살림살이를 전부 집어넣고 현관문을 벗어나는 당신의 뒷모습 같은 것도 상상해 보고.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구불구불하게 뻗은 길 끄트머리에 놓인 교문 위에서 팽팽하게 내걸린 ‘Y고등학교 제56회 졸업식’ 글자를 읽으며 태연한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검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미지근한 바람이 노아를 훑고 지나갔다.

 

*

 

날씨가 부쩍 따뜻해져 이제는 겉옷 없이도 견딜 정도는 되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기도 하고.
난간에 몸을 기댄 채로 졸업식, 졸업식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건물에 가린 지평선을 내려다보듯 시선을 멀리 잡는다. 진작 알려줬을 법도 한데 왜 이걸 당일에 와서야 말했는지 영문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와 달라고 직접 선언한 만큼 못 갈 것도 없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기념이 될 만한 선물은 뭘 줘야 하나 덕담은 또 무슨 소릴 해야 하나 이런 번잡한 생각만 머릿속을 휘휘 돌았다. 씻고 옷 갈아입고 근처 꽃집에서 꽃다발이라도 포장해서…… 지금 나가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한가로이 담배나 피울 때는 아니었지만 성급하게 군다고 해서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담뱃재를 툭툭 털며 에밀리는 마음을 굳혔다. 졸업 축하한다고 말하자. 그리고 또.

대강 정리하고 나니 어려운 게 없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빠르게 씻고 옷장에서 깔끔한 옷을 꺼내 걸친 다음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오자 정오가 다 되어 따끔거리는 햇살이 에밀리의 빛바랜 머리카락을 정수리부터 두껍게 관통한다. 어차피 처음부터 보긴 글렀으니 감동의 포옹 시간이나 엄수하자. 에밀리는 근질근질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아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아 확인한 꽃집까지 걸었다.

너저분하게 널린 화분과 바닥에 흩어진 흙을 피해 안쪽까지 들어갔는데도 영 인기척이 없다. 졸업식이라 꽃을 좀 사려고 하는데 다들 뭘 많이 사 가시나요, 하면 알아서 척척 값나가는 꽃으로 만들어 주겠지만 눈에 들어오는 게 있으면 그것도 섞어 넣을까 싶은 마음에. 연애니 기념일이니 필요가 있는 사람이야 꽃말 몇 개쯤은 외우고 있겠지만 에밀리는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어 발자국을 잔뜩 남기는 동안 이상하게도 그녀는 기묘한 안정을 느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축축한 흙 비린내와 그늘진 풀 냄새에 둘러싸여서. 포위당한 옥상에 누워 자신의 허벅다리를 찌를 첫 번째 총소리를 기다리는 마음가짐으로……. 긴장과 초조함, 빽빽한 이파리 너머에서 얼굴을 감춘 괴한에 대한 공포, 익숙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가슴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뻐근한 안도감, 아주 옅은 환희 따위가 뭉쳐 에밀리를 짓누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무표정으로 저 너머의 상대방을 향해 말한다. 꽃을 좀.

 

“사려고 하는데요.”

풀 속에서 불쑥 포장된 꽃다발이 솟아오른다. 수십 갈래의 줄기를 꽉 옭아맨 남자의 손은 시체처럼 창백하다. 맵시 있게 모양을 낸 청록색 봉투 안에는 색색깔의 꽃이 싱싱하게 참수되어 매달려 있었다. 분홍 리시안서스. 노란 튤립. 안개꽃. 리본은 파란색이 좋겠어요. 담배 한 대만 피워도 될까요. 담배도 어쨌든 식물로 만든 건데 얘네도 기분 좋을 거예요, 아마도. 친구를 만났잖아요. 시답잖은 농담에도 웃지 않는 화분들. 발밑이 우글우글 일그러지면서 곡선을 그린 무채색이 에밀리의 몸 위로 기어오르려던 찰나.

“꽃 사러 오셨어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인의 목소리에 환각은 녹아내려 사라진다. 현실로 돌아오자 가게 한구석에서 입꼬리를 내린 채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여자가 ‘졸업식에 가져가려고요’ 하며 우두커니 선 것만 볼 수 있었다. 주인은 능숙하게 꽃 몇 개를 골라 포장한다. 튤립과 안개꽃. 그리고 장미 비슷한 것으로. 각각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꽃말을 읊어줄 것도 아니었으니까.

꿈속에서 깨어나 에밀리는 이제 따뜻한 색감으로 번진 햇빛 아래 보도블록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띄우자 길게 뻗은 이동 경로 맨 끄트머리에서 현재 자신의 위치가 깜빡깜빡 명멸한다.
노아는 이렇게 긴 거리를 매일 오가고 있었나. 버스나 자전거도 안 타는 것 같던데. 가끔 학부모 회의 안내장 따위가 집으로 건너왔으나 일정도 좀체 맞출 수 없을뿐더러 일부러 방문해서 얼굴도장 찍고 싶어 하는 유형도 아니었으므로 노아의 학교에 가본 적은 여태껏 없었다.

초록 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다리를 뻗어 내디디려던 찰나, 자동차 한 대가 아주 작은 틈을 남기고 에밀리를 쌩하니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왼쪽으로 꺾어 돌면서 사과도 없이 엔진 소리만을 남기고 멀어진다. 무어라 내뱉을 틈도 없이 갑작스레 이런 일이 벌어지면 마땅히 놀라야 할 순간을 놓쳐 어떤 반응도 내놓을 수 없게 된다. 에밀리는 도자기로 빚은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 위로 약간의 당혹을 섞어 바르면서, 허어,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가 이내 담배 연기를 뱉어내듯 속 안에 있던 약간의 짜증까지 길게 토해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는지 꽃다발 포장지에서 바스락 소리가 묵직하게 났는데, 내려다보니 강한 바람 탓에 꽃 일부가 살짝 뭉개져 있었다. 손가락을 넣어 이리저리 살피자 두어 장 떨어진 이파리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꽃다발이 아닌 게 되느냐, 하면 아니었고 꽃은 여전히 꽃일 뿐이었으나…….

그저 아까보다 조금 덜 예쁜 모양의 꽃이 된 거지. 에밀리는 다시 모양을 잡아 꽃다발을 수습했다. 자리에 잠깐 멈추어 서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점점 짧아져 간다. 낭비하기엔 아까운데. 마저 걸으면서 생각한다. 죽어가는 꽃에 대해.

하지만 이건 감성적인 생각. 영원히 사는 생물은 없고 누구나 공평하게 끝이란 게 존재해서, 그에 따라 팔려 가는 생물에게 붙는 값은 유동적이고, 평등한 ‘시간’이 주어짐에 따라 가장 아름다울 때 팔려 와서 값어치를 하는 것만이 그들 모두의 삶에도 도움 되는 방식이 아닌가 하는….
노아 헤르난데스에겐 그런 값어치가 없었다.
아름다움과 쓸모를 매길 수 없는, 죽은 상사의 아들이었으므로.

상사는 죄 사함으로 지급을 끝냈고 에밀리는 전당포에서 물건을 찾았다. 주인은 꼬리표를 제거하면서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한마디 읊조린다. 에밀리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온몸으로 정신없이 네, 하고 대답했다. 그로 인해 노아는 에밀리의 피보호자가 된다.

저를 감싸고 죽어버리기 직전에 내뱉은 말에 대답함으로써 끌어안게 된 어떤 짐. 짐…… 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나. 생각해 보면 에밀리가 노아의 짐일 수도 있겠다. 트렁크에서 시종 덜컹거리며 소음을 내는 쓸모없는 덩어리. 울퉁불퉁한 산길을 내달리는데 길이 꺾일 때마다 함께 기울면서 육중한 비명을 내지르는.

 

 

제아무리 어려도 어떠한 감각은 느낄 수 있다.
본인을 대하는 상대방의 손길, 어조, 시선, 모든 표정, 그런 것들에서.

 

에밀리 샤일록은 무뚝뚝한 여자였으나 가끔은 식은땀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얼굴로 노아를 보고 대했다.
이를테면 함께 장을 보러 간 어느 오후.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당연한 원칙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 강아지 산책하듯 끌고 갈 수는 없으니까, 에밀리는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한다. 노아의 작은 손을 꽉 잡으면서도 쇼핑에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고, 아이가 볼을 발그스름하게 붉히면서 오늘 저녁은 저걸 먹고 싶다고 이끌 적마다 목덜미를 타고 긴장이 흘러내렸다. 익숙하지 않다, 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에밀리가 물건을 집어 들기 위해서 손을 놓아야 하는 그 찰나에 아주 잠깐,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거나 일순 멈칫하는 동작이 노아에게는 보였다. 저를 위해서 필요한 물건을 사고 저에게 먹이기 위해 음식을 고르면서도 에밀리는 여전히 어떠한 충동과 싸우고 있다. 아마도 그게 저를 여기다 버리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아니겠지만. 좀 더 우아한… 생각이었을까. 나로 하여금 이 애가 망가지면 어떻게 하냐는 질책이었을지도. 자신을 향한 무한한 질문. 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게 만드는 작은 공포. 널 책임지겠다는 한마디로 말미암은 모든 감정이 매 순간 에밀리에게 쏟아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아는 두렵지 않았다.
어쨌거나,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르는 이러한 행운이 노아 헤르난데스에게 있어서는 그녀의 죄책감마저 감사할 정도였다. ‘저를 책임져 주셔서 고맙다’는 말이 에밀리에게 무게로 작용할 건 모르면서……
그냥 순수하게 감사하니까.
당신이 아버지께 가지고 있던 호의와 애정이 나에게까지 이어지는 게 고마워서, 그런 말을 당신에게.
(호의와 애정? 세간에선 이런 마음을 그렇게 칭하던가?)

 

노아의 말은 에밀리의 가슴 깊은 곳을 오래오래 짓누르는 닻이 되고,
그 말에 노아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할 수 없든가 완전히 잊어버렸든가. 에밀리는 물건을 카트에 넣고 다시 노아의 손을 잡았고 그날 저녁은 토마토소스가 들어간 파스타를 겨우겨우 만들어 아이에게 먹였다. 후식으로 사 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노아는 즐겁게 웃었다. 그날은 에밀리가 방문을 닫아 따로 잠들었다. 무서운 꿈은 꾸지 않았다.

 

(여기서 이 장면은 커트)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자)

 

*

 

졸업식이 이루어지는 강당 바깥까지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은 품위 있는 사람이거나 그런 사람인 척하고 있어서 군중은 소란스럽지 않았고 이미 꽉 찬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까지도 버겁지 않았으나 에밀리는 수십 가지의 향수 냄새를 온몸에 묻히면서 그들을 뚫고 나아가는 동안 약간 피로해진다. 담배 피우고 싶다……. 주머니 안쪽으로 느껴지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다가 충동을 끊어내듯 단칼에 손을 뺐다. 여기선 아무래도 좀 그렇지.
똑같은 학사모에 똑같은 졸업가운이 늘어서 있어서 개미 떼 같기도 하고 조금 징그럽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짓누르면 금방 죽겠군. 남의 졸업식 날에 할 만한 생각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노아가 몇 반이랬더라.
무리되고 교장이 졸업생을 호명하며 한 명씩 단상에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이렇게 고루한 걸 아직도 하다니. 졸업 자체가 중요하지 교장이 직접 준 졸업장 교장이랑 단둘이 찍은 사진, 이런 게 대체 무어가 중요하다고.
잠깐 나갔다 올까. 하지만 마이크 음질이 나빠 어디까지 불렸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담배 피우는 동안 노아가 나오면……. 에밀리는 근질거리는 손끝을 팔짱 껴서 누르고 그의 이름이 불리기를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 본인의 이름이 불리는 걸 기다리듯 노아의 이름을 기다린다.

 

노아… 는 참 착한 애지.
성실하게 학교도 잘 가고, 성격도 그쯤이면 다정하고, 잔소리가 좀 많기는 하지만. 밥도 알아서 잘 차려 먹고 앞가림도 잘 하고. 솔직히 내가 해준 건 거의 없다시피 한데 알아서 잘 커 줬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도 미지근하게 흘러가더니만 결국은 졸업, 성인을 목전에 둔 채로 여전히 말 잘 듣고 곧이곧대로 잘 따르며 무난한 사이로…….
음.
에밀리는 단 한 번도 노아를 자식 같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 아이가 제게 반쯤 떠넘겨졌다는 이유에서만 비롯된 건 아니었다.
노아가 그를 너무 닮아서.
외모뿐만이 아니라 말버릇이나 성격 같은 것도. 에밀리는 알 수 있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함께 일하며 익히 알아 온 상사의 성격이나 몸에 익은 동작 따위는. 그가 구태여 제 아이에게 가르칠 리는 없을 텐데도 노아는 무의식적으로 흡수한 건지 태어날 때부터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똑같았다.
시절이 엇비슷해졌는데도 노아는 에밀리를 전혀 닮지 않도록 성장했다.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폭사로 숨진 아버지의 흔적이 그 애의 몸 안에 온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밀리는 죽은 상사의 영혼이 노아에게 달라붙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우선 그 사람은 이승에 떠돌 만큼 한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시간이 그렇게 남아돌 것 같지도 않고. 굳이 따지자면 그는 천국에도 지옥에도 가지 못한 채 어중간한 곳에서 분해됐을 것 같달까…….
그래서 에밀리는 머리 없는 남자가 피투성이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자신을 찾아오는 꿈도 딱히 꿔본 적 없었다.
이제 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영원히 저주하고 괴롭힌다는 낭설 따위에 시달릴 이유도 없을뿐더러 그러기에는 에밀리가 목숨을 끊은 사람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그들 전부가 에밀리를 저주하러 왔다면 아마 맨정신으로 견디지 못하고 술에 찌들어 살든 빌딩 옥상으로 기어가 뛰어내리든 했을 거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방증. 설령 나타난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을 터.
에밀리에게 두려운 건 고작 그런 악몽이나 망령 따위가 아니라, 잠이 안 온다며 자신의 방문 앞에 서 있는 어린 노아 헤르난데스 쪽이…….

 

마침내 노아의 이름이 귓등에 닿았다. 에밀리는 강당의 작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단상 앞에서 어룽거리며 작게 산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짙은 푸른색 졸업가운과 같은 색의 학사모를 쓴 채 단상 위로 올라가는 노아는 그 모든 빛을 바깥으로 밀어내듯이 아주 새까맣다. 졸업장을 건네받고 사진이 찍혀 플래시가 터진 다음 노아는 그리운 풍경을 눈으로 담듯 잠시 시선을 올려 장내를 한 바퀴 휙 둘러보았는데, 멀리 서 있던 에밀리는 그와 잠깐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아서…… 손을 흔들어 알은체하기보다는 고개를 까닥여 영문 모를 시선을 받아냈다. 노아의 하얀 홍채가 반짝반짝 빛나며 발아래 드리운 햇빛보다도 밝게 타오른다.

 

노아 헤르난데스.
노아 헤르난데스는 어쨌든 에밀리 샤일록을 꽤 좋아했다.
에밀리는 자신을 책임져 준 사람이고 천애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두어들인 사람 아닌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 다음으로 에밀리가 좋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동경이란 단어를 가져다 붙이기엔 조금 소박한 감이 있다.
노아가 에밀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걸음마다 무게가 있어 남은 발자국이 또렷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보며 따라 걸을 수 있으니까.
저격수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흔적을 남겨선 안 된다는 말이 으레 통용되고 그것은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나, 일할 때와는 별개로, 에밀리는 일상에서 꽤 흔적을 남기는 편이었고 그건 가장 가까이 붙어 지내는 노아가 잘 알았다. 치우지 않고 식탁 위에 가득 남은 담배꽁초. 읽다 말고 반쯤 접혀 뒹구는 조간신문. 대충 배를 채우고 구겨서 처박아 둔 시리얼 봉투. 벗어서 빨래 바구니에 처박아 둔 옷가지. 전부 말끔하게 치우고 수습해도 그녀가 귀가하면 다시 원상 복귀된다.
이런 거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에밀리의 뒷모습. 머나먼 곳을 내다보는 파란색 눈동자는 아침의 햇살에 반사되어 빛바랜 하늘색처럼 보이고.
소리 없이 걸어도 노아에게는 느끼는 인기척이나, 새벽에 들어올 때 지면서 다정하게 들리는……. 그런 순간들. 노아의 안쪽에서 자근자근 밟
히며 흔적을 남기는 기억.
가끔 노아는 신중하게 목표물을 노려보는 에밀리의 얼굴이 궁금했다.
숨을 멈추고 눈은 가늘게 뜬 채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었다. 여느 때와 같이 미동도 없는 무표정일까, 그게 아니면 입꼬리를 올린 조소일까, 그것도 아니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심장 어딘가에서 부글부글 끓으며 혈관을 타고 올라와 뇌를 태운다. 울렁거렸다. 가로등 불빛이 들어와 살짝 희붐한 방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상상을 덧그리면서. 노아는. 그 시선은 언제나 나를 비껴간다고…….
아.
아니다. 딱 한 번. 에밀리가 저를 그런 표정으로 본 적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그렇게 머나먼 이야기도 아니니까 떠올리는 게 어렵진 않았는데, 에밀리는 초반에 저를 정 붙이면 곤란한, 살짝 껄끄럽고 하지만 보드라운… 발치에 자꾸 차이는 무언가처럼 볼 때가 있었다.
제가 바닥에 앉아 책 몇 권을 쌓아 올리며 개중 하나를 집어 들어 읽고 있을 즈음, 에밀리는 베이지색 가죽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채, 저 멀리서… 멀리서 나를 바라보면서, 관찰하듯이 제 행동을 빤히 보았다.
기억은 단편적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머릿속으로 재구성한 허구인지 알 수 없다. 그건 아마 기억을 영상으로 비춰 주는 기계가 발명된다 한들 같을 것이다. 너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스스로 보호하고자 상처받지 않을 만한 방향으로 기억을 왜곡시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이 기억을 닳을 때까지 돌려 봤기 때문에 이것만은 명징한 사실이란 것을 증명, 아니 증명할 수는 없고 보증할 수는 있다. 그만큼이나 날카롭고 목표물을… 보는 듯한, 아주 신중한 눈동자로
그 선명한 파란색 눈으로 나를 꿰뚫는 것처럼
살짝 가늘게 좁혀져 미간에 주름이 지는 얼굴…….

 

노아는 그 순간에 살짝 책갈피를 끼워 두었다. 두고두고 펼쳐볼 수 있도록. 언젠가 에밀리에게도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나요, 질문해 보고 너는 어떤데? 반문이 돌아온 순간에 바로 읊어줄 수 있도록. 에밀리는 달가워하지 않거나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받아넘기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노아는 에밀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퍽 좋아한다.
목표물이 된 듯한 느낌도, 하지만 영영 자신을 쏘지 못할 것 같은 에밀리 샤일록도 전부. 담배를 피우는 동안 저 멀리멀리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내다보는 모습도, 너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이야기해 주는 목소리도. 식사를 대강 때운 채 테이블에 엎드린, 정물화 같은…… 어느 한낮의 기울어지는 햇살 아래 눈이 부셔 눈꺼풀을 닫고 있는 당신의 모습……. 그 모든 것들이 노아 헤르난데스의 머릿속에 아주 오래 남아
노아의 심장을 내리밟는다.
통증을 따라가면 어느 때든 에밀리를 발견할 수 있다.
저 너머에서 인상을 찌푸리는 에밀리 샤일록을 보고 웃는다.

 

*

 

어쨌든 공식적인 행사는 끝나고 만나는 때가 오기는 왔다. 마주친 게 맞았는지 노아는 에밀리가 있는 쪽으로 곧장 뛰듯이 걸어오면서 고마워요, 가타부타 그 말부터 내뱉었다. 에밀리는 기쁨이 담긴 목소 리에 다정하게 대답해 주는 대신 노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단단한 손 끝으로 대강 다듬어 주면서 수고했어, 하고 답한다. 그러고는 가타부타 덧붙이는 말도 없이 꽃다발을 덥석 안겨 주었다. 졸업 축하해.
“아…….”
노아는 처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꽃다발을 좀 더 힘 있게 쥐어 보더니, 가까이 끌어당겨 향기도 맡아보고, 여러 감각으로 그것의 실재함을 증명받은 다음에는 아하하 웃었다. 세상이 무너지기 직전에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온 세상의 건축물을 허물어뜨리는 바보 같고 행복한 웃음소리. 어디가 조금 뭉개졌든 꽃잎이 떨어졌든 그런 것쯤이야 하등 신경 쓰지 않는.
에밀리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살짝 올려 조금 웃으면서,
“졸업한 기분은 어때?”
물었고, 노아는 뺨에 홍조를 살짝 띠면서 “좋아요…….” 대답한다.
(그리고 에밀리가 축하해 줘서 기뻐요…….)

 

노아 헤르난데스의 인생은 이제 2막으로 접어들어, 그들 앞에 어떤 사건이 존재할지는 모르는 일이나, 적어도 1막의 끝부분까지는 충만한 삶으로……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모양이다.
노아는 에밀리의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제 새로운 생각을 한다. 에밀리가 나를 어떻게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어차피 나의 의견은 그녀의 판단을 돌이킬 수 없을 테니 그저 ‘나’라는 사람 자체만으로 당신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을 믿자. 그게 무엇일지는 나 자신도 에밀리도 모르겠지만.
노아는 행운에 기대기로 했다. 이것은 불행해서 기인한 생각 따위가 아니고 하나의 의심도 없는 깨끗한 마음이다. 에밀리에 대한 감사함.
당신 덕분에 제가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앞으로 에밀리가 무엇을 하든 믿을게요.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어디선가 종이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면서 축하를 알렸다. 맑은 하늘에 색색깔의 종이 가루가 날려 퍼졌다. 지금까지의 세상에 작별을.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환영을. 여태껏 수많은 사람이 빌려 입었을 학사모를 허공으로 내던지면서 모두가 웃는다.
저울에서 머리 하나가 굴러떨어진다. 반대편에 있던 노아가 위로 올라갔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노아가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들리지 않는다. 에밀리는 꿈에서 깼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환영 안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이제야 안개 낀 머릿속이 맑아지듯 시야에 들어온 것들을 명확하게 볼 수가 있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노아는 비스듬한 시선으로 에밀리의 눈을 내려다본다.

에밀리가 마주쳐 주었다. 새로 시작하는 세상을.

 

 

幕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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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님 연성교환)